역사를 통해 알아 보는 리더십 이야기 12

성실한 삶을 기록으로 남긴 개혁가, 다산 정약용

코로나19로 감염병 최고 경고 등급인 ‘팬데믹(pandemic)’이 선포되었다.
전 세계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재난 구제를 위해 유비무환의 정신과
신속한 대응을 강조한 정약용의 저서가 떠오른다.

“전염병은 콧구멍으로 그 병기운을 들이마셨기 때문에 생긴다.
전염병을 피하려면 마땅히 그 병기운을 들이마시지 않도록 환자와 일정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
환자를 문병할 때는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
『목민심서』 ‘관질’

오래전에 남긴 그의 저서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그가 남긴 정신적인 유산에는 미래를 준비하는 비결이 담겨 있다. 장장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시대 정신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삶을 반추해 본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의 길을 따라서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4세 때 천자문을 읽고, 7세 때 한시를 지을 정도로 영특했다. 15세 때 장가를 가면서 서울로 오게 됐고, 22세에 이르러 성균관에 입학하여 정조에게 인정받았다. 그는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관직에 있으면서 개혁을 시도하였다. 특히 실학자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옛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하려고 했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를 만들다

정약용은 생애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관직 생활 2년 만에 당색에 불만을 드러내자 그는 해미에 유배되었다. 다행히 정조의 배려로 열흘 만에 풀려났지만, 정조가 승하한 후 신유사화가 일어나 정약용의 형 정약종은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은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강진으로 옮겨졌다. 신유사화가 일어나기 전 정약용은 23세 때 천주교 신자인 이벽(李蘗)으로부터 서학(西學)을 알게 되었고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그는 서학에 빠졌다는 이유로 천주교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고, 결국 긴긴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오랜 유배 생활은 오히려 정약용에게 기회가 되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고, 참신한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개혁을 직접 추진할 수 없었지만, 의지와 열정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본인이 처한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끝없이 고민하고 연구했기 때문에 정치기구의 개혁,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 균점과 노동에 따른 분배, 노비제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마과회통』 등 그가 쓴 저작만 500여 권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다.

깊은 통찰력에서 나오는 삶의 지혜를 전수하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으며, 리더의 덕목과 자녀 교육을 위한 지침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양잠업, 원예업, 양계 등으로 돈 버는 방법을 알려줬고 부모의 불합리한 요구나 행동에 무조건 따르는 것보다 잘못된 것은 비판하라고 전했다. 또한 문화의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서울을 벗어나 살지 말라고 했다. 그는 베풂의 정신도 강조하였고, 남에게 베풀기 위해 먼저 절약할 것을 강조했다.

재화를 비밀스럽게 저장해두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그러면 도둑에게 빼앗길 염려도 없고, 화재로 인해 소실될 걱정도 없으며, 소나 말이 운반하는 고생을 치를 것도 없다. 게다가 자기가 죽은 후에도 꽃다운 명성을 가져갈 수 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어디 있겠느냐. 재물은 꽉 쥐려고 할수록 손에서 더 미끄럽게 빠져나간다.
『아버지 정약용의 인생강의』 中

한편 독서광이었던 정약용은 그의 두 아들에게 자신만의 독서법인 ‘초서’의 중요성을 알려주었고, 독서야말로 인간이 첫째로 해야 할 깨끗한 일이라고 했다.

“초서의 방법이다. 먼저 자기 생각을 정리한 후 그 생각을 기준으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취사선택이 가능하다. 어느 정도 자신의 견해가 성립된 후 선택하고 싶은 문장과 견해를 뽑아 따로 필기해서 간추려 놓아야 한다. 그런 식으로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자신의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은 뽑아서 적어 보관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재빨리 넘어가야 한다. 이렇게 독서를 하면 백 권의 책이라도 열흘이면 다 읽을 수 있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정약용, 『두 아들에게 답함 [答二兒]』 中

1836년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향에서 학문을 마무리하며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61세 때 그는 인생을 정리하며 후대를 기약한다는 뜻으로 ‘사암(俟菴)’이라는 별호를 사용했다. 문학, 역사, 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으며,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하여 도르래의 원리를 활용한 거중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모든 분야에 탁월한 지식과 연구를 선보였던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지도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의 개혁안이 이상에 그치고 실천에 한계를 보였을지라도 그가 품은 생각은 현세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및 사진출처
-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양주시청 문화유산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약용”
- 두산백과, “정약용”
- 네이버캐스트 인물 한국사, “정약용”
- 김병완, 『초서 독서법』, 청림출판(2019)
- 정약용, 『아버지 정약용의 인생강의』, 오세진, 홍익출판사(2020)
-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박석무, 창비(1991)
- "'조선판' 코로나가 돌던 그때, '디테일' 세종의 전염병 대처법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2020. 03. 10., A16면
경험이 재산인 사업 꿈나무
Evel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