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알아 보는 리더십 이야기 7

민족의 역사의식을 깨운 리더,

단재 신채호

역사는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단재 신채호는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을
역사라고 정의하며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로서 이름을 남겼다.
역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이어간 단재 선생의 이야기를 따라가보며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단재 신채호

한 사람의 역사

신채호(1880~1936)는 할아버지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학부대신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를 이어 나갔다. 계몽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독립협회에 참여하였고 향리 부근에 산동학원을 설립하였다. 26세가 되던 해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의 뜻을 내려 놓고 기자가 되어 언론인으로서 본격적인 민족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우리의 역사

한(韓)나라 생각/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람 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 줄 줄 흘러 내려오리니/ 한 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韓)나라 땅에 골고루 뿌리리/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1910년 압록강을 건널 때 선생이 읊은 시-

그는 황성신문의 사장이었던 장지연을 통해 논설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비판하자 황성신문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양기탁의 추천으로 언론활동을 이어가며 일제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비판하고 계몽운동에 힘을 실어 나갔다.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그는 역사물인 <독사신론>,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을 연재하였다. <독사신론>은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한국고대사를 재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영웅 전기를 통해 영웅사관을 제시하며 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이끌어 냈다. 아울러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해 새로운 민족주의적 역사서를 저술하여 이를 국민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독사신론, 이순신전, 조선상고문화사 독립기념관 소장

인간은 역사적 동물

그는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다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결과,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기지를 세웠다. 중국 청도에서 신민회 동지들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고민하였으며 토지개간사업, 무관학교 설립 등을 결의하였다. 또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는 광복회를 조직하였고 기관지를 창간하여 러시아와 중국의 한민족을 계몽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즈음 해외에서 활동하는 망명 지도자들 사이에서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대동단결선언(1917), 대한독립선언서(1919)를 발표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략을 세워나갔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항일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여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였다.

강도(强盜)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간 만행을 거침 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조선혁명선언> 중-

조선혁명선언 독립기념관 소장

국민대표회의가 열린 해, 그는 상해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으나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국사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때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 등을 집필하였다. 그는 삼국시대를 다룬 고대사 연구 중에서도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에 집중하였다. 유교주의나 식민주의 사관을 벗어나 근대적 사학의 기틀을 마련한 그는 역사 연구의 실증을 강조하며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봤다.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연맹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다가 대만에서 외국환 위조 사건의 연루자로 잡혀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였다.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소신 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단재 신채호. 그의 호인 단재는 정몽주의 ‘일편단심’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는 세수를 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물을 얼굴에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옷과 주변 바닥이 물로 흥건해졌다고 할 정도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 기개를 생활 속에서도 보여주었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그는 민족독립운동이라는 목적과 역사 연구라는 수단으로 국민과 국가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였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서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 인간의 내적 삶에는 그가 포함된 사회의 온갖 감정의 추이가 모두 압축되어 있으며 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 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라고 했다. 단재 선생의 치열했던 기록에는 한 사람의 고통이 서려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를 준비하는 희망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지금 우리 삶에 새겨진 아주 작은 흔적도 시간이 흘러 언젠가 기록으로 남게 된다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 기념동상
경험이 재산인 사업 꿈나무
Evel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