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알아 보는 리더십 이야기 6

깊은 통찰력으로 사람을 길러낸 리더,

퇴계 이황

화폐는 나라를 대표하는 도구 중 하나다.
화폐에는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람의 초상화와 시대상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그려져 있다.
이번에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조명된 인물은 아니지만 천 원권 지폐 안에서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을 중심으로 고뇌하는 지식인이자 제자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의 삶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성숙한 학문의 세계로 나아가는 의지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은 조선 중기 학자로 대표적인 사림파다. 사림파는 진보적 개혁가로 주자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적 사상을 계승하였다. 이기이원론은 만물의 존개가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졌다고 가리키는 이론으로 기대승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황은 성리학을 통해 군주가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는 정치를 해야 덕치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성리학을 제외한 이단은 철저하게 배척하였다. 또한 온건 노선을 취하며 전면적 사회개혁보다 군주가 성덕을 갖춰 덕치를 해야 하는 유가의 원론적 가르침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확고한 주장과 사상이 학문의 다양성을 갖추기 어려워 개화가 늦어졌다고 할 수 있으나 그가 연구했던 성리학은 영남학파로 이어졌으며 일본의 성리학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퇴계이황상

학문의 동반자들과 함께한 뜨거운 소통

2017년 tvN <알쓸신잡 2> 안동 편에서 이황과 기대승의 치열한 철학적 논쟁이 소개되었다. 이황과 논쟁을 벌인 상대는 31세에 과거 급제를 한 기대승이다. 그 당시 이황은 57세로 기대승과 스물여섯 살이나 나이 차가 났다. 나이, 직급을 막론하고 학문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소통했던 이들의 모습이 학문을 대하는 순수함으로 비춰진다. 이들은 13년간 1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다. 4단은 이(理)에서 7정은 기(氣)에서 나오는 이기이원론을 강조한 이황, 4단은 7정 속에 포함된 이기일원론을 주장한 기대승.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과 생각으로 소통을 이어나갔다.
이황은 4단에서 인간의 품성인 의로움, 예의, 지혜 등이 발현된다고 여겼으며 7정은 기쁨, 노여움, 즐거움, 슬픔 등 보통의 감정이 기의 작용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와 달리 기대승은 4단, 7정 중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없으며 이치와 기운이 합해진 것으로 봤다. 이들의 다른 주장은 결국 이치가 발현함에 기운이 따르는 4단, 기운이 발현함에 이치가 따르는 7정을 최종 정론으로 삼았다.

특히 이황은 순수한 도덕 감정을 통해 인욕을 누르고 천리를 따라야 하는 수양론의 길을 내세웠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기대승의 이론이 우호적이었다.율곡 이이, 정약용이 기대승의 논리에 힘을 실어 이치와 기운이 현실에서 구분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이황은 기대승뿐만 아니라 이이와의 만남에서도 학문적 깊이와 성숙함을 드러냈다. 1558년 23세 청년 이이는 58세 퇴계를 찾아갔다. 이이는 이틀 동안 이황 곁에 머물며 학문을 중심으로 토론을 벌였다. 학문적 입장과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한 관계였다.

도산서원

교학상장을 실천한 지식인

주자 연구로 선비들의 스승이었던 이황은 시대를 주도하는 학문적 기반을 닦았으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제자들에게 엄숙하면서도 자상한 면모를 보이며 친구처럼 다가갔다. 어린 제자에게도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교육비가 없어도 배우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황은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22편을 모아 <자성록>이라는 문집을 만들기도 했다. 이 문집은 자신이 쓴 편지를 다시 보고 재점검하면서 자신을 성찰하며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자신에게 냉철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주관을 잃지 않는 모습이 고뇌하는 지식인을 떠올리게 한다. 제자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인 만큼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은 도산서원을 지었다. 현재 도산서원은 이황이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과 사후 이황을 기리기 위해 지은 곳으로 나뉘어 있다.

인생의 중년과 노년에 빛난 학자 이황. 그의 삶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요 저술은 50~60대에 걸쳐져 있으며 인생의 후반전에 제자들과 치열한 논쟁으로 학문의 완성도를 높였다. 지금 이 시대에 이황의 사상은 지루하고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그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삶의 태도는 계승해야 할 것이다.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며 자신의 인격 수양은 물론이며 다음 세대를 따뜻하게 길러낸 그는 참된 스승이다.

참고문헌 및 사진출처
강우방, 『한국 미의 재발견』, 솔출판사(2004)
김형찬,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바다출판사(2018)
이진표, 『한국사상사』, 학문사(2002)
이황, 기대승, 『사단칠정을 논하다』, 책세상(2014)
정옥자, 『우리선비』, 현암사(2002)
"고령기의 퇴계 이황 선생: 물러섬(退)의 학으로 한삶을 마무리", 동양일보, 2018년 4월 8일
"[목멱칼럼]참스승 퇴계가 그립다", 이데일리, 2018년 5월 24일, A25면
"[열려라 공부] 26살 차 이황•기대승, 13년간 편지 논쟁… 사제는 학문의 동반자", 중앙일보, 2018년 1월 1일, A16면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형수)
한국관광공사, 김지호
경험이 재산인 사업 꿈나무
Evel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