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알아 보는 리더십 이야기 8

우리말의 중요성을 일깨운 학자, 주시경

영화 <말모이>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으며, 영화 제목이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말모이는 주시경 선생이 우리말로 사전을 일컫는 말을 고민하다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와 더불어 어두웠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흔적을 돌아보며
학자이자 지도자로서 살아온 주시경 선생의 일생에 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우리말의 힘을 깨닫다

주시경 선생(1876~1914)은 근대화 운동이 한창 시작될 무렵에 태어났다. 선생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가 캐 온 산나물과 도라지로 죽을 쑤어 식구들과 나누어 먹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다 둘째 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상경을 한다. 선생은 한학을 배울수록 한문에 회의를 느껴 우리말과 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때 한문을 왜 배워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한글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문명 강대국은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말을 배재학당 선생들에게 듣게 되자 그는 자국어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한글회관 주시경 흉상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 길은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존중하여 쓰는 것이다."
-주시경 선생

민족을 지키는 힘을 기르다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주시경 선생은 민족주의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1894년 배재학당에서 서재필 선생을 만나 민중을 계몽하기 위한 뜻을 모았다. 서재필 선생은 국문전용론자였으므로 국어 연구와 보급을 통해 민족의식을 강화하려고 했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과 더불어 서재필 선생은 주시경 선생을 신문사 총무이자 교보원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주시경 선생은 <독립신문> 사내 조직으로 ‘국문동식회’를 조직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고 신문을 제작하기 위해 맞춤법을 정리하고 통일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이 조직은 1908년 국문연구회로 전통이 이어졌고 1931년 조선어학회로 해방 이후 한글학회로 계승되었다.

말의소리, 국어문법

그런데 선생은 반정부, 반침략 투쟁을 펼치기 위해 양기탁, 이동녕 등 여러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만민공동회운동을 이끌어 갔다. 그러다 수구파 정부의 무력 탄압으로 지도자들이 하나둘 체포되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시골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때도 선생은 끊임없이 한글을 연구하였으며 [국어문법]을 완성하게 된다.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 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국어문전음학(1908)] 中

우리말을 가르치기 위해 온 힘을 쏟다

선생은 글자꼴과 맞춤법의 본보기 규정을 포함한 음운 이치를 정리하고 기술한 [대한국어문법]을 발간하였다. 이를 민중에게 보급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해 나갔다. 나아가 음성론과 소리갈 등의 국어문법을 연구한 [국어문전음학], 초등 국어교과서인 [국문초학] 등을 발간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더불어 선생은 국문연구회에 참여하였고 1907년 상동 청년학원에 국어강습소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이때 선생은 청소년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우리말과 글을 가르친다고 하여 ‘주보따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 속에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국어 교육은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선생은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9개 학교에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가르침을 이어 나갔다.

“눈물을 머금은 '주보따리'는 언제나 동대문 연지동에서 서대문 정동으로, 정동에서 박동으로, 박동에서 동관으로 돌아다녔다. 스승은 교단에 서시매, 언제든지 용사가 전장에 다다른 것과 같은 태도로써 참되게, 정성스럽게, 뜨겁게, 두 눈을 부릅뜨고 학생을 응시하고, 거품을 날리면서 강설을 하셨다. 스승의 교수는 말 가운데 겨레의 혼이 들었고, 또 말 밖에도 나라의 생각이 넘치었다.”
-주시경 선생의 제자 최현배-

국어대사전

선생은 나라를 잃은 판국에 언어까지 잃게 되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한글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였다. 마지막 저술로 알려진 [말의 소리]는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후진에게도 영향을 끼쳤으며 최현배, 신명균, 이규영 등 550여 명의 강습생을 배출하였다.

주시경 선생은 암울한 세상 속에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간 독립운동가였다. 근대화를 개척한 학자이자 지도자의 삶을 살았던 선생의 흔적은 지금 이 시대의 말과 글에 정체성을 심어주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선생의 마음이 다음 세대에도 오롯이 전달되기를 기대해 본다.

주시경공원 기념비
경험이 재산인 사업 꿈나무
Evel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