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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봄이 있네

산천이 하루가 다르게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요즘,
어딜 가나 꽉 막힌 꽃놀이 여정이 부담스러웠다면 여기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어느 방향으로 셔터를 눌러도 봄바람이 만들어내는 초록 물결에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곳, 전라남도 보성이다.
지금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지나고 있는 차밭에 봄꽃까지 환히 등을 밝히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茶香 따라 진한 역사가 흐르는 땅, 전남 보성

여행지로서의 보성은 밥상으로 치면 단연 ‘진수성찬’이다. 맛과 향과 역사의 고장 보성에는 국내 차(茶) 재배 면적의 37.7%에 이르는 녹차밭이 들어앉아 있어, 마을지도 한 장 들고 여행에 나서면 하루해가 부족하다.

보성 읍내에서 영천리 율포로 이어진 18번 국도를 따라 수십 개의 녹차밭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고개를 굽이굽이 휘돌아 감싸는 밭이랑에 오르면, 영천저수지와 득량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관과 마주하게 된다. 보성 최대 차밭은 대한다원이다. 하늘을 가릴 만큼 높고 곧게 뻗은 아름드리 삼나무 숲길은 수많은 CF와 영화에 등장한 명소이기도 하다. 오솔길 사이 작은 계류를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가 여행의 나른함을 달래줄 즈음, 능선을 따라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차밭이 눈앞에 열린다. 봄기운을 머금은 초록융단이 산과 들, 바다와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이루는 모습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가늘디가는 차나무 가지 끝마다 여린 찻잎들이 새순을 돋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4월 중순 무렵 새순 채취를 시작으로 5월이 되면 짙푸른 녹색의 향연이 펼쳐질 터이다. 이곳에서 빠른 걸음은 반칙이다. 가슴까지 차는 고랑마다 시간의 지층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걸으며 삶에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차밭 산책은 따로 목적지를 정할 것도 없다. 구성진 남도의 소리를 닮은 야트막한 구릉도 아름답고, 밭 사이사이로 흩어지는 차향은 귓가를 스치는 바람처럼 싱그럽다. 솜이불을 깔아놓은 듯한 찻잎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면, 보성 땅이 내뿜는 진한 설록의 향이 온몸에 퍼지는 듯하다.



느긋하게 걸으며 봄날을 만끽하시라!

보성 여행은 보성읍과 벌교읍 두 군데로 나눠 봐야 한다. 보성읍이 녹차밭을 중심으로 한 친자연적인 여행지라면, 벌교는 역사가 살아있는 여행지라고 할 수 있다.

벌교에는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금융조합 건물 등 적산가옥이 많다. 벌교천 한가운데 놓인 소화다리(부용교)는 여순사건 등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를 품고 있다. 격동기였던 한국동란 때는 처형장소로 쓰여, 다리 아래 갈대밭이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총알 자국이 다리 곳곳에 선명하다.



적산가옥을 개조한 옛 여관, 보성여관은 소설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묘사된 곳이다.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근현대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보성여관은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숙박객이 아니더라도 차 한잔에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한옥 체험형 숙박시설이자 소극장, 카페를 갖춘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보성여관은 이제 소설 속 이름인 ‘남도여관’으로 손님을 맞고 있다. 벌교 읍내에 있는 ‘태백산맥 문학관’도 빠뜨릴 수 없는 코스다. 2m가량의 높이로 쌓인 소설 [태백산맥]의 초고를 비롯해, 감명받은 독자들이 한 글자 한 글자 필사한 노트도 발길을 붙든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을 쓰기 위해 4년간 준비하고 6년간 집필했다고 한다. 그가 발로 뛰어다니며 수집한 자료, 여러 권의 수첩에 깨알같이 메모한 취재 내용과 그림을 보면 묵직한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다.

벌교는 식도락 여행자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벌교=꼬막’이라는 등식이 무색하지 않게, 이름 없는 밥집에 가도 싱싱한 꼬막으로 맛깔스러운 한상을 뚝딱 차려낸다. 남도 음식의 정수로 배를 채웠다면, 이제는 전통의 향기를 맛볼 차례다. 보성과 회천을 연결하는 고개인 ‘봇재’는 서편제 소리꾼들이 넘었다고 해 ‘소리고개’로도 불리는 곳이다. 봇재 너머, 옛 시간의 한 덩어리를 떼어 놓은 듯한 전통마을에는 세상의 향방에 굴하지 않고 수십 수백 년을 지켜온 민초의 삶이 켜켜이 스며 있다. 나지막한 담 너머 장독대 등 옛 여염집 풍경이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고즈넉한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차 한 잔 음미하다 보면 가슴 속 스트레스는 금세 어디론가 가고 없다. 눈 깜짝할 새에 피고 지는 꽃잔치가 아니니 조바심낼 필요도 없다. 세상 시름 놓고 유유히 흐르는 물 따라, 계절마다 피어나는 풀 따라, 보성의 역사는 한순간도 머무름 없이 묵묵히 흐르며 여행자를 기다린다.




보성 여행정보

남도여관(구 보성여관): 전남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길 19
태백산맥 문학관: 전남 보성군 벌교읍 홍암로 89-19
대한다원: 전남 보성군 보성읍 녹차로 763-67


글. 윤진아
사진. 김선재, 보성군청 문화관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