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임에도
매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9주년을 맞아 그의 흔적을 따라가보며
민족의 평화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려고 한다.
시대적 사명을 띠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安重根) 의사(1879~1910)는 어려서 안응칠(安應七)로 불렸다. 사서와 사기 등을 읽으면서 성장하였고 틈이 날 때마다 말타기와 사냥을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4년,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는 한편 그 다음 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다 평양으로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상점을 팔아 삼흥학교를 세웠다. 1907년, 연해주로 이동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고 대한의군참모중장이자 아령지구 사령관 자격으로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으로 건너가 일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싸움에서 지고 물러났다. 그후 노에프스키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단지동맹으로 뜻을 세우다
1909년 2월 7일, 동지들과 만나 의병활동 방안을 협의하고 ‘동의단지회’라는 소규모 조직을 결성하였다. 동지 12명은 왼손 약지(藥指)를 끊고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이라는 글자를 쓰며 맹세하였다. 그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동지들과 결심한 뒤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뜻을 향해 몸을 던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하얼빈 총영사, 궁내대신 비서관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붙잡힌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체포된 후 그는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어머니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회유 속에서 편지 한 통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편지였고, 편지를 읽은 후 안중근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中-
옥중에서도 그는 소신 있게 행동하며,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 집필에 몰두하였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후세에 거사의 이유를 밝히는 책이었다. 그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면서 일제에게 이 책이 완성할 때까지만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 말을 무시하고 1910년 3월 26일, 형을 집행하였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지난 3월 30일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규모를 확대해 재개관했다는 소식이 보도되면서 독립운동의 정신을 돌아보는 움직임이 다시 일고 있다.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에서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의 혼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민족을 위한 지도자의 삶이 이 시대를 위한 교훈이 되기를 바라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이 아닌 용기로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