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불황형 소비’로 인식되던 중고거래가 MZ세대의 새로운 소비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소유보다 공유가 익숙한 이들은 중고가 단순히 '남이 쓰던 낡은 물건'이 아니라
'스토리가 담긴 물건'이라며 열광한다.
흔하지 않은 중고 물품들 사이에서 유니크한 상품을 발굴하는 경험은 일종의 취미가 됐다.
남들과 다른 희소성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의 취향과 만족도를 중시하는 ‘덕질’ 성향 때문이다.
규모 커지는 중고시장…’공유경제’ 날개 달고 본격 확대
중고 물품을 선호하는 심리는 경제 불황이 심화될 때마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중고는 저성장이 약화하는 가운데 소비자들이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라며 "나름의 수입 속에서 적게 쓰지만 만족은 크게 얻으려는 전략"이라고 '중고' 트렌드를 명명했다.
중고거래는 대표적인 '불황형 소비'의 한 모습이다. 경기 불황 속 사용하지 않는 물건에 대한 처분 욕구가 커지는 동시에 상태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하고자 하는 욕구가 맞물리는 현상이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중고거래 시장은 약 20조원대로 추산된다. 지난 2008년 이후 12년 만에 약 5배 가량 성장한 수준이다.
중고거래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이유는 다양하다. 먼저 생산과 소비의 경제보다 '공유경제'라는 개념이 각광받은 영향이 컸다. 최근 소유보다는 공유해 쓰는 '협력소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중고물품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드는 추세다. 환경 파괴를 멈추고 제품을 오래 사용하겠다는 사회적 가치 추구가 반영된 소비 문화다. 새 제품을 쉽게 사서 마구 쓰고 버리는 고도성장기의 소비 행태에 대한 반격이라고 평가하는 시선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빨라진 언택트(비대면) 사회도 영향을 미쳤다. 재택근무가 확산되고 급여가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집에 보관중이던 물건들을 팔아야겠다는 욕구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어플리케이션의 발전도 한 몫 했다. 중고물품 거래플랫폼 '당근마켓'은 지난 4월 기준 월간순이용자수(MAU)가 약 156만명을 기록해 11번가(137만명), 위메프(109만명), G마켓(107만명) 등 주요 오픈마켓을 크게 제쳤다.
’희소성’ 중시하는 젊은 층에겐 또 하나의 ‘문화’
특히 최근의 중고거래 열풍은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반 출생)의 '경험 소비'의 일환으로도 분석된다. 중고거래를 단순히 저렴한 가격 때문에 중고 물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를 '경험' 혹은 '이야기'를 담은 가치품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MZ세대인 이들은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해외여행 등 다양한 경험들을 하며 자라왔다. 흔하지 않은 중고 물품들 사이에서 마음에 드는 상품을 발굴하고자 하는 경험이 일종의 취미가 된 것이다.
개인이 지향하는 가치가 중요해지면서 슈테크(슈즈+재테크), 샤테크(샤넬+재테크) 등으로 불리는 '리셀'도 이들 세대를 중심으로 활발해지는 추세다. 최근 스타벅스의 '서버 레디 백'을 위해 커피 300잔을 샀다는 한 소비자의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한정판 제품이나 개성 있는 빈티지 아이템을 위해 이들은 거리낌없이 중고 시장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 효용을 얻기도 한다. 한정판에 대한 높은 수요 덕분이다. 젊은 세대에게 ‘리셀’이 하나의 재테크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나이키나 아디다스 등 마니아층이 확실한 브랜드를 중심으로 리셀러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들은 한정판 구입을 위해 며칠씩 매장 앞에서 밤을 새워 대기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일례로 지난해 나이키는 빅뱅의 지드래곤과 협업해 ‘에어포스1 파라-노이즈’를 출시하면서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구매를 원하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당첨확률이 1.78%에 불과한 응모권 8888장을 선착순 배부한 것. 이조차도 나이키 티셔츠와 나이키 스니커즈 ‘에어포스1’ 모델을 착용해야 응모할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이 상품은 중고 시장에서 300만원에서 최대 1,000만원까지 거래됐다. 공식 판매가가 21만9,00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최대 50배에 육박하는 수익을 기록한 셈이다.
미래에도 중고거래는 시장의 주류 트렌드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경기불황과 코로나19 사태 등 특수한 상황으로 반짝 떠올랐지만 중고거래가 주는 경제적 편의성과 개인의 취향을 중시하는 MZ세대의 소비성향 등에 힘입어 앞으로 더욱 빠른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래 시장 잡아라…사용자 편의성 중시한 중고거래 플랫폼 속속 등장
중고거래 플랫폼도 진화하고 있다. 대부분 온라인에 기반한 거래 방식인 만큼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인 보완책을 속속 선보이는 추세다.
업계 최상위로 떠오른 '당근마켓'은 '당신 근처의 마켓'이란 뜻으로 동네 거래를 표방한다. 이용자의 스마트폰 GPS 인증을 통해 반경 6km 내 상품을 조회할 수 있다. 전국이 아닌 지역으로 장소를 한정하면서 주민끼리 직접 만나 소통하고 거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당근마켓이 '대면'에 초점을 둔 서비스라면 번개장터는 비대면 중고거래를 내세우고 있다. 대신 자체적인 안전결제 시스템을 갖춰 사기 등 미연의 사고를 방지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구축했다. '번개톡'과 '번개페이' 등을 통해 판매자와 구매자가 바로 소통하면서 거래 진행과 송금까지 완료할 수 있어 간편하다는 장점도 있다.
투명 박스 안에 든 물건을 직접 눈으로 보고 거래할 수 있는 '파라파라'도 인기다. 당근마켓의 효용성에 언택트를 더한 방식이다. 파라파라에서 중고물품을 수거해 검수를 거쳐 중고박스 안에 넣어두면 구매자들은 마치 자판기를 이용하듯 눈으로 상품을 살펴보고 현장에서 바로 구입할 수 있다.
주요 소비층의 선호도가 변화하면서 한정판 마케팅 시장이 확대되자 본격적으로 ‘리셀; 시장에 뛰어든 기업도 있다. 네이버는 올해 초부터 자회사 ‘스노우’를 통해 한정판 스니커즈 리셀 플랫폼 ‘크림’을 선보였다.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도 이와 유사한 리셀 플랫폼인 ‘솔드아웃’을 오픈했다.
가성비를 추구하는 동시에 웃돈을 얹어 본래 가격보다 비싸진 리셀 상품이 인기를 끄는 이중적인 소비 행태는 중고 물품에 대한 최근의 인식 변화를 보여준다. '절약 정신'으로 대표되던 중고거래는 MZ세대의 성향에 힘입어 이제 또 하나의 뉴노멀 소비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