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Out

충남 서천에서
‘금빛 겨울’과 마주하다

먼 거리를 날아온 철새들은 지친 날개를 쉬어가며 다시금 비상을 준비하고,
겨울을 맞은 갈대는 땅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머무르고 떠나는 모든 것들에 상냥한 인사를 건네는, 충남 서천이다.
이맘때 찾아가면 떼 지어 날아오르는 철새의 군무까지 볼 수 있는 서천은
겨울여행지 중에서도 단연 명품코스로 꼽힌다.

시간이 멎은 판교마을

서천 판교마을은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힙한 여행지’로 뜨는 곳이다. 빛바랜 간판, 녹슨 철문 등 마을 전체가 마치 1970년대 영화세트장 같은 느낌을 준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을 거쳐 산업화 시기를 버텨낸 오랜 건물마다 세월의 애환이 서려 있다. 도시화와 함께 젊은이들이 빠져나가 쇠락한 마을에 최근 젊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레트로 여행의 출발지는 마을 어귀에 있는 농협 창고다. 자물쇠가 걸린 빨간 철문에는 ‘협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판매하자’는 표어가 남아 있다. ‘공관’이라 불리던 극장 매표소에 새겨진 영화관람료는 일반 500원, 청소년 200원이다. 슬레이트 지붕과 낡은 나무문이 조화를 이루는 백세건강원, 파란색 지붕을 인 적산가옥은 젊은 여행자들이 가장 많은 인증샷을 남기는 포인트다. 판교마을 여정의 종착지는 마을 북쪽의 주조장으로, 3대째 가업을 이어 마을사람들에게 술을 공급하던 곳이다. 세월의 때가 묻은 시멘트 건물의 창 사이로 달력이 보이는데, 주조장의 시간은 20여 년 전인 2000년 12월에 멈춰 있다. 바스라질 듯 낡고 바랜 골목 곳곳을 걷는 걸음걸음이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이다.

TIP. 판교마을 스탬프 투어 : 판교역에서 ‘스탬프 투어’ 지도를 받은 뒤, 지도에 있는 6개 스폿에서 도장을 찍어 가면 마을 건물이 새겨진 그림엽서를 기념품으로 받을 수 있다.

해넘이와 해맞이를 한 곳에서

서천 북쪽 끄트머리의 작고 한적한 어촌인 마량포구는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길게 튀어나온 지형적 조건 때문에, 태양의 위치가 남쪽으로 많이 이동해 있는 겨울철에는 섬이나 육지에 걸리지 않고 온전히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감상할 수 있다. 포구 인근의 마량리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69호)에는 500년 수령의 동백나무 8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룬다. 바닷바람을 피할 수 있는 언덕마루에는 중층(中層) 누각 동백정이 있는데, 동백정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가 장관을 이룬다.



서억서억 은빛 갈대의 배웅

충청도와 전라도를 가르며 흐르는 금강은 서해로 흘러들기 전에 장대한 갈대밭을 펼쳐 놓았다. 무려 10만여 평에 이르는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 갈대밭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병헌과 송강호가 처음 마주친 곳으로, 겨울 한기 속에 가장 빼어난 비경을 뽐낸다. 금강 하류의 퇴적물이 쌓인 곳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신성리 갈대밭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갈대 7선’이자 ‘한국 4대 갈대밭’으로 뽑힌 대표적인 갈대 서식지다. 바람을 가르며 너울너울 춤추는 키 높은 갈대 사이로 산책로가 이어져 있는데, 갈대를 주제로 한 시구가 곳곳에 적혀 있어 운치를 더한다. 금강을 따라 이어진 둑길을 걷다가 얼기설기 엮어 만든 습지 위에 놓인 흔들다리도 건너보자. 자녀들의 방학에 맞춰 습지 생태를 공부하는 기회로 삼아도 그만이다.

쉬다 가라, 철새처럼!

서걱대며 출렁이는 갈대밭 위로 후드득 철새가 날아오른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귀한 손님, 겨울 철새가 창공에서 펼치는 화려한 군무도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서천과 군산 사이로 흐르는 금강하구엔 11월부터 가창오리, 고니, 청둥오리 등 30여 종 수십만 마리의 희귀철새가 몰려들어 장관을 연출한다. 국내 최대 철새도래지 금강하구는 2012년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경로 파트너십에 등재돼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인정받았다. 수천 마리의 새가 동시에 허공을 박차고 솟아오르는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 한 해를 멋지게 시작할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술 익는 마을에 들어 세상 근심을 잊다

서천에 왔다면 한산 소곡주는 꼭 한잔 마셔봐야 한다. 첫 잔을 마시면 그 향기로운 맛에 반해 일어날 수 없고, 두 번째 잔을 마시면 어느새 손끝, 발끝까지 취해 몸을 일으킬 수 없다 하여 ‘앉은뱅이술’이라고 불린다. 한산 소곡주는 지금껏 전해지는 한국 전통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술이다. 찹쌀과 누룩을 주원료로 하는 한산 소곡주는 보통 음력 10월 셋째 주쯤 빚는데, 설에 맞춰 맛있게 숙성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잔 가까이 코를 대면 고소한 누룩 향이 스며들고, 한 모금 머금으면 입 안 가득 찬찬히 달콤한 기운이 번진다. ‘한껏 달려왔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어서라’고 청하는 선조들의 선물이다.

글. 윤진아
사진. 김선재, 서천군청 홈페이지